앞에서는
조선
초기에
수용되었던
주요
화풍들에
관해서
대강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이 시대
화풍의
특색을
작품들에
의거해서
가능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선
초기중에서도
회화가
특히
발전하였던
때는
세종대왕의
재위기간(1419∼1450)을
전후했던
시기이다.
물론
산수화도
마찬가지이다.
안견과
강희안은
이 시기에
활약했던
대표적
산수화가들
이다.
그 후에
산수와
인물을
함께
잘 그렸던
최경(崔涇),
배연(裵連),
안귀생(安貴生),
이상좌
등 이
속속
배출되었던
것이다.
특히
안견은
조선
초기와
중기의
산수화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와
그의
추 종자들,
즉 안견파화가들의
작품들에
한국적
특색이
특히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안견의
화풍을
우선
살펴보고
그 화파의
양식적
특색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안견은,
세종대왕의
셋째
왕자이며
당시의
최대의
중국화
소장가이자
송설체(宋雪體)-조맹부체(趙
孟 體)-서예의
대가였던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비호
아래
대성한
조선
초기의
대표적
산수화가이
다.
그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곽파
또는
곽희파화풍을
수용하여
독자적
세계를
형성한
화원이
었는데
그의
화풍상의
특색은
그의
진작(眞作)인
[몽유도원도]<도
4>와
전칭작품인
[사시팔경
도]<도
>
등에
잘 나타나
있다.
1447年
4月
20日에
시작하여
3日만에
완성을
본 [몽유도원도]는
그의
후원자인
안평대군이
꿈 속에
거닌
도원을
묘사한
것인데,
좌측의
자연스러운
현실세계와
우측의
환상적인
도원의
세계가
현저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圖
4∼6>.
사방을
둘러싼
岩山들이
도원을
외계로부터
분리하고
있 다.
왼쪽에
치우친
현실세계의
산들은
낮으막하고
부드러운
데 비하여
도원을
둘러싼
암산(岩山)
들은
끝없이
다양하고
또 지극히
환상적이다.
이러한
대조적인
두 요소의
결합이
극도의
환상적
인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데
[몽유도원도]는
몇 무더기의
산과
언덕들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총체적인
산수화를
이 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각 산과
언덕들은
파고드는
안개
때문에
서로
분리된
채 하나의
조 화된
산수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전체의
경관(景觀)은,
간극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기보
다는
거의
독립성을
띤 산군(山群)들이
함께
결합되어
이루어진
종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색은
조선
초기의
산수화에서
종종
엿볼
수 있다.
[몽유도원도]에서
엿볼
수 있는
또 한가지
특색은
상이한
시각의
적용과
넓은
공간에
대한
관 심이다.
즉 이
작품의
왼쪽
반은
정면에서
본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데 반하여
오른쪽
반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듯 조감도법(鳥瞰圖法)을
기용하여
넓은
공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몽유도원도]는
좌측으로부터
우측을
향해
점차
상승하는
운동세(運動勢)를
보이고
있으
며,
수직적인
요소와
수평적인
요소가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선운동과,
수직과
수평의
현저한
대조가
이 작품을
웅장한
자연의
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안견은
그의
[몽유도원도]에서
흩어진
듯 조화를
이루는
구도,
확대된
공간의
시사,
수 직과
수평의
대조
및 사선운동에
의해
교묘하게
달성된
웅장감,
환상세계의
효율적인
구현
등 독
자적
양식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화풍상의
특색은
부분적으로
그의
전칭작품들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의
작품으
로 전해지고
있는
산수화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사시팔경도]<도
>이다.
[이른
봄]과
[늦은
봄]의
장면부터
[이른
겨울],
[늦은
겨울]의
장면까지
사계(四季)의
팔경(八景)을
묘사한
이 [사시팔경도]의
작품
하나
하나는
한쪽
종반부(縱半部)에
치우친
이른바
편파구도(偏頗構圖)를
보여준다.
따라서
두 폭이
합쳐져야만
좌우가
안정된
대칭을
이루게
된다.
또한
하나의
작품은
몇 개의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경군(景群)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군들
사이에는
대개
넓은
수면이나
안개로
채워져
있다.
이렇게
흩어져
있는
경군들은
그러나
교묘하
게 결합된
듯이
조화되어
있다.
[만춘(晩春)]<도
>이란
작품에서
보듯이
근경의
경물은
안개에
의해
원경의
주산(主山)과
분 리되어
있으나,
그림의
왼쪽
구석에서
45도
각도로
솟아오른
비스듬한
언덕과
그 위에
서있는
소 나무에
의해
서로
시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건너편
강안의
사구(沙丘)도
이 두
개의
경군
들과
조화를
이루는
지점에
놓여
있다.
이처럼
실제로는
경물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서 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듯 표현된
것이
이 [사시팔경도]의
구도상의
큰 특색이다.
또한
이 흩어진
경군들
사이에는
넓은
수면과
안개의
바다가
있어서
확 트인
공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개념과
건너편
강안
및 사구의
묘사는
아무래도
남송원체화풍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뭏든
[만춘]의
그림에
보이는
이러한
구도상의
특색과
공간개념은
[초동(初冬)]<圖
>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도
역시
한쪽
종반부에
무게가
주어진
편파구도를
이루
고 있고
또 몇
개의
흩어진
경군들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근경의
언덕은
원거(遠距)를
향해
물 러나고
있고
원경의
주산(主山)은
압도할
듯이
근경을
향해
기울어져
있어,
실질적으로는
따로따
로 떨어져
있는
근경과
원경이
느낌에
있어서는
서로
결합되어
있는
듯하다.
그밖의
경군들도
이 근경과
원경의
경군들과
조화를
이루는
위치에
배치되어
있어
산재하는
모든
경군들이
서로
어우
러져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들
경군들
사이에
펼쳐지는
공간은
수면을
따라
끝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시팔경도]에
보이는
이러한
구도상의
특색과
공간개념은
앞에
논의한
[몽
유도원도]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후대의
화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전(傳)
안견
필의
[사시팔경도]에
보이는
구도상의
특색과
공간개념은
15세기는
물론
다음
세 기인
16세기
전반기의
화가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었다.
우선
[사시팔경도]의
구도는
16세기
전 반기에
이르러
두 가지
계열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사시팔경도]의
구도를
토대로
하면서
중 경에
경군을
삽입하여
근경,
후경의
삼단구도(三段構圖)를
이룬
것이며,
또 하나는
[사시팔경도]
의 구도를
큰 변화없이
그대로
따르면서
공간의
확대에
보다
역점을
둔 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는
양팽손(梁彭孫)의
[산수도(山水圖)]<도
>와
필자미상(筆者未詳)의
일본
대 원사(大願寺)
소장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도
>
병풍
등이며,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국립중
앙박물관
소장의
[소상팔경도]
화첩과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
등이
다.
편파구도계
산수화
양팽손의
[산수도]<도
>는
그가
기묘사화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생활을
했던
1521년
부터
1545년까지의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믿어지는데,
그 기본적인
양식은
약 1세기
전의
작품인
전(傳)
안견
필의
[사시팔경도]에서
발전된
것이다.
즉 안견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사시팔경도]와
마찬가지로
그를
공부한
양팽손(1480∼1545)의
[산수도]도
한쪽
종반부에
치우친
편파구도와
흩 어진
경군들의
조합을
보여준다.
그러나
양팽손의
작품에서는
중경에
언덕과
산이
배치되어
있어
훨씬
복잡하게
보이고,
근경,
중경,
후경이
점차
상승하며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크게
다른
차이점이라
하겠다.
또한
주산이
좀더
규칙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짙은
안개의
바다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듯하며
주변
의 공간이
훨씬
무한하게
확대된
모습을
나타내는
것도
16세기
전반기적인
특색이다.
그리고
중 경의
언덕
위에
의관(衣冠)을
정제한
선비들이
자연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것도
조선
초기의
회화에서
이따금
접하는
특색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16세기
전반기적인
특색은
1539년에
일본승(日本僧)
존해(尊海)가
일본으로
가져
간 엄도(嚴島)
대원사(大願寺)
소장의
[소상팔경도]<도
>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이 [소상팔경도]
병풍의
[연사모종(煙寺暮鐘)]을
한 예로
보아도
쉽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도
>.
편파구도
속에
상승하며
후퇴하는
모습의
삼경(三景)이며
안개
속에
떠 있는
주산,
광활한
공간
등 모든
요소들이
양팽손의
[산수도]와
동일
시기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다.
사천자(泗川子)
소장
의 [소상팔경도]도
이 범주에
속한
전형적인
예이다.
전(傳)
안견
필의
[사시팔경도]에
보이는
구도를
보다
충실히
따르고
있는
16세기
전반기의
대 표적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자미상-속전(俗傳)
안견
필-의
또다른
[소상팔경도]
화첩을
들 수
있다.
이 화첩의
[어촌석조(漁村夕照)]와
[강천모설(江天暮雪)]을
예로
보아도
그 유사성이
자명해진다.
그러나
이 화첩의
작품들에는
15세기
전반기의
안견의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던
단선점준(短線
點 )이
나타나고
있다.
점선(點線)과도
같은
짧은
선들과
점들로
이루어지는
이 단선점준은
16세
기 전반기,
그 중에서도
1530년대에
가장
성행하였던
한국적인
준법인
것이다.
이러한
단선점준은
안견화풍의
영향을
받은
16세기의
작품들에
자주
보이지만
안견
자신의
고안은
아니다.
이 준법
은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창안된
것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편파구도계의
작품들과
이제부터
고찰할
좌우가
균형잡힌
대칭구도계(對稱構圖系)
작품들에도
자주
보이고
있다.
대칭구도계
산수화
대칭구도와
단선점준을
동시에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는
1531년경에
제작된
재일(在日)
[독서당
계회도(讀書堂契會圖)]이다.
한때
독서당에서
공부했던
학자들의
계회를
묘사한
이 그림은
우선
그 짜임새부터가
조선
초기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상단(上段)에는
계회의
제목(題目)을
쓰고,
주 단(中段)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한 계회의
장면을
그렸으며,
하단(下段)에는
계회
참석자들의
약전
사항(略傳事項)을
적은
좌목(座目)이
적혀
있다.
이러한
계회축(契會軸)은
조선
초기에
발달한
독 특한
형태이다.
[독서당계회도]의
구도가
비록
앞에
살펴본
그림들의
구도와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
로는
근경,
중경,
후경의
상승후퇴(上昇後退)와
확산된
공간개념은
역시
마찬가지로
16세기
전반
기적인
특색인
것이다.
이 작품은
좌우가
잘 균형을
이루고
있고
또 수면을
따라
대각선운동(對
角線運動)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매우
짜임새
있고
안정감
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전체의
형태와
구도뿐만
아니라
준법과
필묵법에서도
조선
초기의
한국적
특 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의
언덕과
산은
거의
모두
전형적인
단선점준으로
처리되어
있는
데,
이 준법은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조선
초기
안견파
회화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색인
것이
다.
또한
원경의
주산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듯이
흑백의
강한
대조가
또 하나의
큰 특색을
이루고
있다.
즉 먹이
칠해진
부분과
칠해지지
않은
부분이
하나의
반점(斑點)처럼
강렬한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흑백의
대조는
조선
초기와
중기의
작품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하나의
큰 한국적
특색으로서
중국회화나
일본회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와같은
흑백의
강렬한
대조가
조선
초기
화가의
작품이거나
조선
초기
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믿어지는
일본의
[파초야우도(芭蕉夜雨圖)]나
보스톤
미술관
소장의
문청(文淸)
필(筆)
[산수도]
등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조선
초기의
회화와
일본
실정시대(室町時代)의
수묵화의
밀 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하나의
좋은
증거라고
하겠다.
어쨌든
[독서당계회도]에
보이는
양식적
특색의
일면은
조선초기의
일부
안견파
산수화들에
잘 나타나
있다.
일본화에
끼친
영향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안견파
산수화들의
구도나
공간개념
등은,
조선
초기
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
실정시대
수묵산수화의
비조인
주문(周文)과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들에서도
잘 간취된다.
전(傳)
주문
필의
[죽재독서도(竹齋讀書圖)]
등의
작품들과
그의
추종
자인
악옹(岳翁)의
[산수도]
등은
그 좋은
예들이다.
이러한
일련의
주문파
작품들의
양식적
특색
에 대해서,
전 경도국립박물관장인
송하륭장(松下隆章)씨는
[주문과
조선회화]의
관계를
논의하면
서 주문이
서울을
다녀간
1424년
이후에
그려졌으리라고
믿어지는
작품들
중에는
[전경,
중경,
후 경의
삼단으로]
이루어진
구성,
그리고
{전경과
중경
사이에
깊고
넓은
공간을
두어
보다
퍼스펙
티브한
효과를
올리고
있는}점
등의
특색은
조선
초기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라고
지적하
고 있다.
그러나
일본
화가들의
작품들은
구도나
공간의
처리에
있어서는
조선
초기의
산수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주면서도
산이나
바위의
묘사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조선
초기의
산수화들과
는 달리
남송
원체파
계통의
필묵법과
준법을
구사하고
있다.
즉 구도와
공간처리법은
우리
나라
조선초기
안견파의
것을
따르고
준법과
필묵법,
수지법
등은
남송대
마하파
것을
택하는
등 두나
라 화풍을
절충하여
새로운
일본식
산수화를
창안해
낸 것이다.
이 점은
실정시대의
회화가
조선
초기의
산수화와
긴밀하게
교류하였으면서도
일본적
미감에
알맞는
자기들
나름의
양식을
형성하
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강희안·이상좌의
화풍
및 미법산수화풍
안견과
더불어
15세기
중엽
세종조에
활약했던
대표적
문인화가
강희안의
화풍은
이제까지
살 펴본
안견파의
화풍과는
현저한
차이을
보인다.
강희안의
화풍을
말해주는
대표적
작품으로
[고
사관수도]가
알려져
있다.
바위
위에
팔짱을
끼어
턱을
고이고
물을
바라다보는
선비가
절벽을
배경으로
묘사되어
있다.
산수가
위주가
되고
인물이
소극적으로
다루어지던
안견파의
작품들과는
달리,
[고사관수도]에
서는
반대로
인물이
핵심이
되고
산수는
부수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다.
즉 절파계
소경산수인물
화(小景山水人物畵)의
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필치가
활달하고
세련되어
있으며
문기(文
氣)가
풍기고
있어서
화원이나
직업화가의
작품과는
큰 차이를
드러낸다.
이러한
절파계의
화풍은
15세기에는
아직
널리
수용되지
못했으나
조선중기에는
크게
유행하였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산수화에서
안견파
및 강희안의
화풍과
더불어
주목을
요하는
것은
이상좌의
화풍
이다.
이상좌는
남송의
마원화풍을
수용하여
대성했던
인물로
여겨지는데,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은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송하보월도]이다.
왼편
아래
귀퉁이에
언덕이
있고
그 언
덕으로부터
장송(長松)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이처럼
한쪽
구석에
무게가
치우쳐
있는
일각
구도(一角構圖)와
굴곡이
심한
소나무,
그리고
바람을
등에
지고
달빛
아래
거니는
선비와
동자
(童子)의
모습
등은
이 [송하보월도]가
남송대
마원의
화풍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이상좌의
진필(眞筆)인지는
분명치
않다.
또 그의
아들인
이숭효(李崇孝)와
이 흥효(李興孝),
그리고
그의
손자인
이정(李楨)의
그림들은
마원의
화풍과
거리가
멀고,
안견파화풍
이나
절파화풍을
보여주고
있어
[송하보월도]의
화풍과
차이가
크다.
어쨌든
이러한
남송의
화풍
은 조선
중기에도
일부
화가들에
의해
수용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밖에도
조선
초기에는
미법산수화풍이
수용되어
한국적
화풍
형성에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
15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최숙창,
이장손,
서문보등은
원대
고극공의
미법산수화풍을
토대로
독특
한 그들
나름의
화풍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들의
산수화들은
서로
비슷비슷한
일종의
미법산수
화풍을
보여
준다.
특히
연운(煙雲)에
둘러싸인
주산들과
그 주변의
모습은
지극히
시적(詩的)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서
미법산수의
제1차적인
특색을
반영해
준다.
그러나
이 산수화들도
구 도,
수지법,
준법
등에는
부분적으로
그 시대에
풍미하던
안견파화풍의
영향이
은연중
감지된다.
독자적인
한국적
화풍의
성립
조선
초기의
산수화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곽파화풍에
토대를
두고
발전한
안견파화풍이
가장
널리
유행하였고
그밖에
일부
화가들은
남송의
원체화풍이나
명대의
절파화풍
또는
미법산
수 화풍
등을
수용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한국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대체로
1550년경을
전후해서
조선
초기의
산수화는
안견파
화풍에
토대를
두면서도
남송
원체
화풍이나
절파화풍을
가미하여
그 이전의
화풍과
양식을
달리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으로
믿 어진다.
이러한
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호조랑관계회도(戶曹郞官契會圖)]<도
>나
신사임
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산수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자는
구도면에서
마원의
[화등시연
도(華燈侍宴圖)]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기타의
여러가지
측면에서는
안견파의
화풍을
여전히
반영
하고
있다.
후자는
구도와
공간개념
및 수지법
등에서는
안견파화풍의
전통을
반영하면서도
산이
나 암괴의
표면
처리에는
절파화풍의
영향을
엿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 두
작품들은
안견파화
풍 위주의
조선
초기로부터
절파화풍이
풍미하게
되는
조선중기로
옮아가는
전환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초기의
한국
화가들은
중국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중국회화와는
다른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고
일본의
회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적
회 화의
특색은
안견파의
화풍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그러한
특색은
구도,
공간개념,
준법
등 여러
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조선
초기의
화가들은
대체로
전통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경향은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16세기
전반
이후의
조선왕조
화가
들이
이미
확립된
15세기의
한국적
화풍을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동시대적인
중국
명의
화풍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던
점은
그 좋은
본보기이다.
조선
초기의
화가들이
이렇듯
독특한
한국적
화풍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이
지 니고
있던
그들
나름의
미의식(美意識)과
전통주의적(傳統主義的)
또는
고전주의적(古典主義的)
경향,
그리고
중국회화의
조심스럽고
선별적인
수용
태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서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