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山水畵(上)』,
韓國의
美 11
(中央日報社:
1980)에
실린
필자의
논문
"朝鮮初期
및 中
期의
山水畵"를
수정,
보완한
것으로
본 도록에
수록된
작품이외의
작품도판은
앞의
책을
참조하
기 바람(편집자
주)
1.
머리말
우리나라
미술사상
회화가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때는
조선왕조
시대이다.
이
시대의
회화
는
초기(1392∼약
1550),
중기(약
1550∼약
1700),
후기(약
1700∼약
1850),
말기(약
18520∼1910)
의
4기로
화풍의
변화에
따라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초기와
중기를
묶어서
전반기로,
후기와
말기
를
합쳐서
후반기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1392년
건국시부터
약
1550년
경까지의
기간에
해당되는
초기는
그
근간을
이룬다고
하겠다.
조선
초기에는
이미
도화원(圖
院)-후에
도화서(圖
署)로
개칭됨-이
설치되어
이를
중심으로
회화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화원(
員)들뿐만
아니라
왕공
사대부(王公
士大夫)들
중에서도
그림
을
좋아하고
즐겨
그리는
사람들이
다수
나타나
초기의
화단에
더
한층
활기를
불어넣었던
것이
다.
그러나
고려시대(918∼1392)에
일반회화
분야에서도
한몫을
단단히
했던
승려화가들의
활동은
이
시대에
이르러
억불숭유정책(抑佛崇儒政策)
때문인지
크게
위축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회
화를
발전시켰던
것은
화원들과
왕공
사대부화가들의
두
계층이었다고
하겠다.
조선
초기에는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그림뿐만
아니라
순수한
감상을
위한
회화가
크게
진작되
었고
그림의
소재도
다양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작품과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듯
순수한
감상을
위한
회화가
크게
성행한
것은
당시의
왕공
사대부들의
생활과
사상을
반영해
주
는
것이라
하겠다.
이
시대에는
대나무,
산수,
인물,
영모,
화조
등
다방면의
그림들이
그려졌지만
그중에서도
산수
화는
가장
널리
제작되었던
것이다.
산수화는
궁중의
각종
행사나
사대부들의
계회(契會)를
묘사
하는
실용적
목적의
그림들에서
자주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감상을
위한
목적으로
빈번하
게
제작되었다.
즉
산수화는
자연을
사랑하는
당시
사대부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밀착되어
크
게
성행되었던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의
작품들의
대부분이
산수화인
점도
이
시대의
이러한
경향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산수화는
회화양식의
특색과
그
변천을
가장
구체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에
이
시대의
산수화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화단의
동향을
어느
정도
신빙성
있게
추구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왕조
초기와
중기의
산수화를
지극히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