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장승업

<吾園張承業의 미술 세계 >

장승업은 조선 초기의 현동자(玄同子) 안견(安堅), 조선 후기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또는 조선 후기의 겸재(謙齋) 정선(鄭敾)을 추가하여 4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 대가들 중에서 가장 늦은 19세기 후반에 활동하여 현대인들과 시대적으로 가장 가깝기도 하다.

그러면 장승업이 이처럼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화가로 손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의 뛰어난 예술적 업적 때문이다.

장승업은 고아로 태어나서 쇠퇴해가는 국가의 운명을 지켜보며 화가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를 둘러싼 환경은 조선 초기 세종 연간에 활동한 안견, 그리고 조선 후기 영조·정조 연간의 문화적 황금기에 활동한 김홍도와 정선보다. 훨씬 열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승업은 이들 대화가들 중 누구 못지 않은 왕성한 창작력과 무소불위(無所不爲)의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작품은 넘치는 신운(神韻)으로 유명하였다.

장승업은 또한 일체의 세속적인 일을 돌아보지 않고 진정한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그에게는 금전도, 권력도, 심지어는 가정도 하찮은 것이었고, 오직 예술과 그 예술적 영감을 북돋아주는 술뿐이었다. 그래서 고종(高宗)임금의 어명을 받아 궁중에서 한 작업도 그에게는 구속이었고, 그림의 대가로 받은 금전도 간수하지를 못했으며, 어쩌다 얻은 부인과의 가정생활도 꾸려가지 못했다. 장승업은 일평생을 그의 그림을 구하는 후원자들의 사랑방이나 술집을 전전하며 뜬구름같이 보냈다. 육당(六堂) 최남선(崔南善)은 장승업의 이러한 순수한 예술적 정열을 지적하여

"그의 예술안(藝術眼)에는 왕자(王者)와 부호(富豪)가 다 없었다……그의 예술상의 불후의 업적은 이 고결한 지조의 결과였다"라고 적평(適評)하였다.

장승업의 작품은 산수화·인물화·화조화·동물화·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등 아주 다양하며, 이 여러 종류에서 모두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그린 것이 화조화·동물화·기명절지화이며, 산수화와 인물화는 상대적으로 적다. 장승업이 많이 그린 화조화, 동물화, 기명절지화는 형태상 병풍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아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장승업의 회화는 양식적으로 볼 때, 전통화법과 외래 화법을 종합·절충하여 자신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장승업이 시작했던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이래 상당히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화풍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백은배(白殷培:1820∼1900), 이한철(李漢喆:1812∼1893), 유숙(劉淑:1827∼1873)등이며, 이 중 유숙은 장승업의 초년 스승이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에는 그 이전, 즉 18세기 중국 양주팔괴(楊洲八怪)의 화풍이 이미 유입되어 있었고, 또 당시 중국의 신화풍도 수입되고 있었다. 새로 수입된 신화풍도 수입되고 있었다. 새로 수입된 신화풍이란 당시 번창했던 신흥도시 상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조지겸(趙之謙:1829∼1884), 임이(任　, 任伯年), 오창석(吳昌碩) 등 소위 해상파(海上派)와, 광동성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거소(居巢)와 거렴(居廉) 형제 등의 초기 영남화파(嶺南畵派)의 화풍을 말한다.

그러나 화가로서 장승업의 위대성은 어떤 한 가지 유파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뛰어난 기법과 양식적 다양성을 가진 독자적 경지를 이룬 데 있다.

장승업이 즐겨 사용한 기법으로는 필선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주는 백묘법(白描法), 정교하고 아름다운 공필(工筆) 채색화법, 이와는 정반대인 호방한 필묵의 감필법(減筆法), 수묵의 깊은 맛을 보여주는 파묵법(破墨法), 근대적 감각을 보여주는 신선한 선염 담채법, 그리고 최후에 이룩한 깊은 정신미가 깃들인 수묵 사의화법(寫意畵法)등을 들 수 있다.

장승업은 조선 후기의 대화가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의 오원(吾園)으로 자호(自號)하였다. 그리고 매번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는 신운(神韻)이 생동한다고 자부하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자부심은 예술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서 오는 내적 자신감의 표현이며, 이는 그의 뛰어난 작품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를 안견, 김홍도와 함께 한국 회화사에서 진정한 대가의 반열에 자랑스럽게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장승업의 회화는 초월적 예술정신의 발현이자 암울했던 시대를 밝힌 찬란한 예술혼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장승업의 산수화는 처음에는 조선 말기에 유행했던 형식화된 남종산수화풍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남종산수화풍은 중국에서는 청(淸) 초기 사왕(四王)에서 정형화하였고, 우리나라에도 각종 화보(畵譜)나 회화가 수입되어 전래되었다. 그러나 장승업은 습작기를 지나자 곧바로 이런 형식화된 산수화풍에서 벗어나 다양한 양식적 실험을 하게 된다. 이런 양식 추구에서 장승업이 주로 공부한 대가는 송(宋)의 화가나 원(元) 사대가(四大家) 등 상당한 시대를 거슬러올라간 인물들이었다.

실제로 장승업이 작품의 제발(題跋)에서 언급한 화가들을 보면 송의 미불(米), 원 사대가 중 왕몽(王蒙)과 황공망(惶恐望), 그리고 역시 원대의 방종의(方從義) 등 송·원대의 대가들이 많다. 이것은 장승업이 당시 형식화한 남종화를 거부하고, 산수화에서 더욱 근원적인 것을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문인산수화풍뿐만 아니라 장승업의 후기 작품에서는 남송(南宋) 원체화(院體畵)의 대표적 기법인 부벽준도 즐겨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장승업이 추구한 이러한 다양한 양식적 실험은 결국 살아 숨쉬는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로 귀결된다. 그가 그린 산수화가 세밀한 공필의 금벽산수화(金碧山水畵)이든, 간일한 수묵 선염의 사의적 산수화이든, 거기에는 모두 자연의 생명력이 약동하고 있다. 산의 형태나 준법의 필치 하나하나에도 리듬과 운율이 있으며, 줄지어 선 나무나 바위의 모습에도 즉흥성과 생명력이 살아 있다. 장승업 산수화의 이런 생명력 넘치는 필묵법은 그 정신 면에서는 팔대산인(八大山人)과도 상통하며, 또한 현대적이기도 하다.

장승업의 산수화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기 보다는 이념적·관념적 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형식화한 관념적 남종산수화 대신 그 근원이 되는 송·원대의 산수화풍을 추구하였고, 또 정밀한 필선과 채색의 북종(北宗) 산수화풍도 실험하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터득한 예술의 진리, 즉 자연의 생명력을 산수화라는 아름다운 형식을 통해 표현하였다. 우리는 장승업의 산수화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이상향의 세계-산과 숲과 물과 사람과 동물들이 모두 조화로운 세계를 볼 수 있다.

장승업의 회화 중 외형상 가장 중국적인 것이 인물화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즐겨 그린 인물화의 소재는 왕희지(王羲之)·이태백·예찬(倪瓚)등 역사적 인물이거나, 신선·포대(布袋)·삼장법사 등 도석인물이든간에 대부분 중국적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인물화의 기본 구성을 청 말 상해지역에서 출판된 화보에서 따오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장승업의 인물화는 다른 소재에 비해서도 특히 중국적이며 모화적(慕華的)·사대적(事大的)이라고 부당하게 비판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승업이 그린 작품의 소재가 중국적이라고 해서 그 그림이

반드시 비예술적인 것은 아니다. 그가 다룬 중국적인 소재들은 당시 시대가 요구하던 형식이요, 그림의 외형일 뿐, 장승업 인물화의 위대한 가치는 예술의 세계에서 진정한 초월적 인간상을 표현해낸 데에 있다. 사실 왕희지나 도연명, 이태백 등의 인물들은 당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추앙받던 대표적인 초월적·초시대적 인물들이다.

그들이 만약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이 악착같은 현실세계에서 권력과

돈을 위해 싸웠다면 대중의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요, 또 장승업의

그림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예술가 오원은 자신의 깨달음과 초월을 통해 이런 역사적 혹은 신화적 인물들의 처세에 깊이

공감하였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장승업의 인물화에서 이런 초월적인 면은 주인공이 머금고 있는 신비스러운 미소로

표현된다. 그의 인물들이 한결같이 머금고 있는 미소는 바로 초월의 미소요, 곧 오원 자신의 깨달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있다.

한편 화법 면에서 장승업의 인물화는 단원 김홍도의 신선도 묘법,

중국 양주팔괴 중 황신(黃愼)의 인물화법, 진홍수(陳洪綏)를 계승한 해상파 임이의 인물화법 등이 모두 섞여 있다. 그러나 장승업은 이런 다양한 요소들을 흡수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래서 정미한 백묘법에서 호방한 감필법과 파묵법, 그리고 만년의

깊은 정신성을 보여주는 수묵사의 인물화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화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그래서 그는 인물의 미소를 통하여 회화

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초월적 자유의 경지를 표현하였

으며, 그리고 어렴풋한 자태와 암시로 영원의 세계를 시사하였던 것이다. 장승업의 인물화에 나타나는 이런 초월적 미소와 깊은 암시성은 어떤 면에서는 램브란트의 깊은 사유나 진홍수, 임이 등의 차가운 이지(理智)보다 더욱 순수예술에 가까운 경지라 할 수 있다.

장승업이 가장 즐겨 그린 분야가 화조영모화이다. 이 화조영모화 속에는 새와 동물 외에도 사군자와 파초, 소나무, 오동나무 등 각종 화훼와 수목이 곁들여진다. 또 이들 소재는 병풍으로 많이 그려져서 하나의 전형이 되어 안중식과 조석진을 통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소재상으로 보면 새 종류로는 기러기와 독수리 혹은 매, 학을 가장 즐겨 그렸고, 오리·닭·까치·구관조(九官鳥)·앵무(鸚珷)·참새 등도 많다. 동물 종류로는 개(犬)·고양이·말(馬)·사슴(鹿)·원숭이 등이 있는데, 개는 보름달이 뜬 오동나무와 함께 그려진 것이 많다. 그런데 병풍의 경우 기러기 다음으로 어해(魚蟹)가 많이 그려지는 점도 주목된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소재의 다양성과 함께 여러 가지 대상에 날카로운 관찰력과 치밀한 묘사, 섬세하고 아름다운 채색, 그리고 생동하는 필묘(筆妙)를 보여주어 전문화가로서의 기량이 가장 잘 확인되는 분야이다. 또한 단순히 정확하고 아름다운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잘 파악하여,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다. 중년기 이후의 화조영모화에서는 치밀하고 섬세한 기교가 더욱 원숙해지는 한편 필묵법이 점차 호방해져서 화면에 바람이 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풍부한 채색 대신 수묵선염, 혹은 파묵법의 사의적 표현으로 이행하여, 깊은 정신적 경지를 보여주게 된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소재상으로나 화법상으로나 조선시대 전통회화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동시대 청나라 임이, 조지겸 등 해상파의 청신한 화조화풍도 참조하였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장승업의 위대성은 소재와 화법이 전통적인 것이든 간에 모두 자신의 왕성한 예술적 영감 속에 용해시킨 데 있다. 그래서 그의 화조영모화는 당대의 그 누구보다도 더 대상의 생명력을 잘 표현해내었던 것이다.

장승업이 화조영모화와 함께 가장 즐겨 그리던 것이 기명절지화이다. 기명절지화란 말 그대로 도자기나 청동기 등 각종 그릇 종류에다가 연꽃, 국화, 매화 등 화훼 절지를 곁들인 그림이다. 그런데 장승업의 기명절지화에는 이 밖에도 목련·백합·모란·난초·수선화 등의 화초, 주전자·소반·연적·붓·인장·책 등 문방도구나 생활용품, 영지·인삼·밤(송이)·석류·옥수수·참외·복숭아·무·배추·홍당무 등의 과일이나 야채, 심지어는 게·조개·생선 따위의 어물까지도 다양한 소재가 그려져 있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서양의 정물화와 소재상 비슷하나 성격상으로는 상이한 그림이다. 정물화는 어떤 특정대상을 관찰하여 묘사한 것으로 대개 사실적이며 정적이다. 그런데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특정한 대상을 묘사하기보다는 필묵의 자유로운 운용과 소재의 즉흥적 해석에서 오는 비사실적이며 역동적인 화면구성이 특징이다. 즉 일상적 소재의 파격적 재해석에서 오는 생동미(生動美)가 그 특징인 것이다. 이런 특징은 지그재그의 즉흥적 구도, 시점의 자유로운 이동, 형태의 왜곡, 자유롭고 분방한 필치의 파묵법과 음영법(陰影法), 경쾌한 담채(淡彩)의 효과적 구사 등에서 기인한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정조 연간에 이미 대유행했다는 조선시대의 책가도(冊架圖)와 정물화, 민화의 전통에, 당시 중국에서 새로 수입된 청 말 조지겸, 임이, 거소와 거렴 형제 등의 세화(歲畵)나 길상화(吉祥畵)의 영향이 가미되어 형성된 것이다. 또한 청이나 조선 후기 이래의 금석(金石) 골동취미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당시의 어떤 회화보다도 즉흥적 필묵의 묘와 파격적 생동미를 갖추고 있다. 그의 예술인(藝術人) 앞에서는 그것이 산수인물이든, 화조 영모이든, 기명절지이든 모두 꿈틀대는 생명력이 넘치고 있다. 장승업이 그린 기명절지화의 세계, 그것은 진정한 예술가의 눈으로 본 물활적(物活的)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국내 고전미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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