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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근대미술에 관한 전시가 다양하게 개최되는 등 근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월간미술》은 1991년 홍익대에서 개설된 ‘근대’ 미술사 강의를 통해 10여 년간 한국 근대미술 연구에 매진한 이화여대 홍선표 교수의 지상 강의를 게재한다.
이번 달은 제1강과 제2강을 함께 수록한다. 필자는 서설을 통해 한국의 근대미술을 단절의 역사로 보지 말고 한국미술사의 한 과정으로 통사화하는 관점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1강 서설

헨리 사베지 랜더 〈조선 병사〉

요즈음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가 하나의 붐을 이루고 있다. 이번 학기 이화여대 대학원의 한국 근대미술사 강의는 70명이 넘는 수강생으로 열기가 넘친다. 이러한 현상은 탈근대 담론의 유행이 빚어 낸 것으로,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과 결부하여 근대를 다시 보고 재검증·재해석하는 최근의 인문사회학 연구 동향에 기인한 바 크다고 하겠다.

지금 우리가 유통하고 있는 ‘미술’과 ‘미술사학’은 그 자체가 ‘근대’라는 패러다임이 만들어낸 일정한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들 시스템의 의미나 성격 등을 정확하게 포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형성의 역사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한국 근대미술사는 이와 같이 현재의 ‘미술’ 체제를 탄생시킨 생성의 공간이란 측면에서 새롭게 탐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한국 근대미술은 한국미술사의 한 과정으로서 통사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유통되고 있는 ‘한국미술사’는 근대미술이 배제된 채 전통미술사 또는 고미술로만 단절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 근대미술사’는 자기 전통미술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분절적 관점에서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미술사’는 근대미술을 포함하여 그 변화상과 전체상을 새롭게 구도 짓고 재구축해야 한다. 근대미술은 한국미술사의 한 단계로 인식되어야 하며 세계미술사와의 관계를 통해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시각에서의 새로운 체계화가 요망된다고 하겠다.

기존 ‘한국 근대미술사’는 ‘한국미술사’와 마찬가지로 내재적 발전론이나 근대화론과 같은 근대주의와 대항 민족주의에 속박되어 역사적 제양상을 실상보다 미화하거나 이상화한 허상으로 만들어진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근대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과잉 해석되었거나 또는 배제된 상태로 구성된 ‘한국 근대미술사’를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실증적 사실의 증대와 더

불어 전체상을 포괄하는 시야와 동아시아 내지는 세계미술과의 유비관계를 통한 특징 파악과 제반 현상을 동서고금을 함께 사유하는 시각으로 해석하는 태도가 긴요하다. 그리고 종래의 작가와 작품, 또는 창작사조와 같은 생산체계 중심의 서술에서 유통제도를 비롯한 미술체제 전반을 대상으로 하되, 그 객관적 조건으로서의 표상시스템이란 인식적·형상적 재현의 메커니즘 또는 담론과의 관련 속에서 맥락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한국미술사의 변천과정에 근대미술의 시점과 종점은 언제일까. 한국미술사의 시대구분은 아직 왕조사관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전체적인 발전과 변화의 단계를 유형화하려는 논의가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근대미술의 기점도 전통미술의 서술이 종료되는 조선왕조 멸망의 시기인 1910년으로 간주해 왔다. 다만 근대미술 연구자들이 기점을 논의한 적이 있었는데, 대체로 국사학계에서의 내재적 발전론이나 민중사관 또는 근대화론과 같은 근대적 이론주의 관점에서 조선 후·말기와 1920년대설이 제기된 바 있다.

자연 출신인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일상적 삶을 살면서 이룩한 일정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모든 활동 및 표현을 문화라고 할 때, 미술도 문화의 한 형태로 사회적 소산물인 것이다.

그리고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의해 규정되는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술의 형성과 전화는 그 객관적 조건인 사회유형과 인간유형의 시대적 변화와 결부되어 있으며, 이를 인식하고, 표현하고, 소비하는 표상시스템의 변동과 직결된다. 이러한 문화사회론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미술사에서 근대적 표상시스템이 탄생한 시기는 1890년대가 아닌가 싶다.

1890년대는 청일전쟁으로 중세적 책봉체제가 붕괴됨에 따라 제후국이었던 조선왕조가 근대적인 독립 ‘국가’로의 체제 개혁을 역사적 과업으로 추구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1894년부터 근대적인 정부 체제 구성과 헌법에 가까운 국가 기본법의 선포와 ‘건양(建陽)’이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데 이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광무개혁을 실시했다. 사회적으로는 독립협회 운동과 《독립신문》 발간을 통해 자주적 공동체로서의 근대적 사회유형인 국가의식을 고양시켜 나갔다. 그리고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전쟁 등에 자극을 받아 단행된 1894년의 갑오개혁에 의해 과거시험과 신분제를 철폐하고 사농공상 사민(四民)의 평등을 제도화하면서 신하와 백성에서 인민 또는 ‘국민’이란 새로운 근대적 인간유형으로의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추진은 서구 계몽주의 사상인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우승열패의 생존적 차원에서 부국강병한 문명국들을 추수하는 방법론으로 촉진되었기 때문에 열강들의 산업자본주의 생산기술력과 경제시스템을 배우면서 식산흥업(殖産興業)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다.

〈학교〉《심상소학》 1896

〈학교〉《심상소학독본》 1887 일본의 《심상소학독본》의 그림과 똑같이 국내실정에 맞추어 제작한 삽화. 지도 대신 창문을 그려 넣은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1890년대에는 이처럼 중화주의와 천하적 세계관, 봉건적 신분제와 농업 중심의 중세적 체제에서 국민국가와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적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하면서 이에 따른 새로운 시스템 구축을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부강하고 독립된 나라의 국민으로 육성하기 위해 공포되었던 1895년의 ‘소학교령’에 따라 관공립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근대학교 제도에 의한 초등교육의 실시는 생각하고 재현하는 표상작용의 근대적인 변동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근대적인 지식과 사고방식, 표현방법, 생활양식 등을 국가가 제도화한 학교교육을 통해 보급함으로써 새로운 표상체계의 형성과 함께 국민화와 근대화를 촉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1896년 학부에서 편찬한 교과서인 《신정심상소학(新訂尋常小學)》은 국가의식의 고취와 국민교육 및 도덕교육의 기초를 비롯해 생활과 사물 인식에 필요한 상식을 담고 있는데, 각 단원의 장면마다 삽화를 수록하여 시각으로 이해하는 효과를 중시하는 근대적 수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삽화는 교과서 편집에 일본인이 보좌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인지 상당부분 1887년 일본 문무성에서 발행한 《심상소학독본》의 도형을 차용해서 번안하여 그려졌다. 단일 시점으로 수렴된 선원근법적 화상과 그림자의 묘사 등, 삽화 자체가 수학적이고 기계론적인 근대화된 표현형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아 이를 통해 과학주의와 합리주의에 기초한 근대적인 시각제도를 체험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초등교육용 교과서에는 국가를 표상하는 기제로서 국경을 지닌 영토, 즉 국토를 하나의 국가적 공간으로 외부와 경계를 두고 그려진 한반도 지도와 상징물인 태극기를 수록하여 단일성과 동질성을 지닌 근대적 국가의식을 배양하고 이미지화하여 확대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96년 1월 1일을 기해 음력에서 양력을 채택하고 하루를 12간지에 기초해 12시간으로 구분했던 종래의 방식에서 24시간제라는 전세계적 표

준시각 체제로 변경했던 동질적이고 등분화된 근대적인 시간개념을 시·분·초를 알리는 기계시계를 삽화로 그려 넣어 설명하였다. 이러한 시간관은 근대인의 일상적 삶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제도로서, 이 시기에 출현하여 교과서를 통해 개념과 이미지를 습득하고, 학교에서 시간표에 따라 활동하게 되면서 내면화되었을 것이다.

《심상소학》은 또한 한글 중심에 한자를 병용하는 방식으로 서술하여 한글의 공문화와 국문화를 확산하면서 언문일치라는 근대적 표기체계에 의해 지각하고 사고하고 표현하는 새로운 표상체계를 형성케 하였다. 주시경이 “조선문은 조선어의 그림자요 조선어의 사진이라. 그림자가 그 형체와 같지 않으면 그 형체의 그림자가 아니요, 사진이 형체와 같지 않으면 그 형체의 사진이 아니라”고 했듯이 언어와 문자를 그림자나 사진처럼 똑같게 일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언문일치의 일정한 시점에서 본 대로 말하고 쓰는 수법은 단일한 시점에서 본 대로 충실히 그리는 사생적 리얼리즘과 상합되어 근대적 표상형식으로 제도화 또는 관습화되는 의의를 지닌다. 특히 사생적 리얼리즘은 초중등 도화시간의 자재화(自在畵) 수업을 통해 널리 보급되었으며, 1920년대부터는 관전의 주류 양식으로 권력을 누리면서 인생주의나 문화주의 미술론과 결부된 고상한 인격 도야와 감성 고양의 주제의식에 종속되어 전개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심상소학》에는 ‘후일에 모두 병사가 되어 용맹하게 우리 나라를 지킨다’는 내용을 비롯해 인물 삽화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거의 배제되어 있어 국민화가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 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개화기 교과서 삽화 전반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성향이었다.

1890년대에는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같은 근대적 표상시스템인 대중매체가 출현하여, 국민국가 형성과 관련된 문명개화와 식산흥업, 학술문예사상 및 교육 등에 관한 담론을 조성하고 배포하여 이를 사회화하고 일상화하는 제도가 수립되기 시작했다. ‘논설’이란 형태를 통해 당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을 비판하면서 현실 인식을 표출하고 이를 대중적 시각으로 확대하여 공공화와 의식화를 도모하였으며, 이러한 비평의식은 근대적 자각과 인식을 심화하고 보편화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899년 주미공사였던 이범진(李範晉)이 신문에서 사진 제판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듯이 사물과 사건을 복제된 인화를 통해 시공을 초월하여 추체험하게 된 것은 시각 능력의 확장과 전파에 따른 세계관과 인식의 변화와 함께 시각의 양태 자체를 바꾸는 의의를 지닌다. 이와 같이 신문을 비롯한 잡지류의 정기간행물과 단행본 서적의 기계화된 인쇄술에 의한 대량생산과 더불어 사진·삽화 등의 복제 이미지를 대량 유포할 수 있는 시스템의 등장은 근대적 표상체계의 형성과 전개에 막중한 작용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890년대에는 국민국가를 비롯한 근대적 표상시스템의 출현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미술을 주도하게 될 ‘서양화’의 2차 파급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차 파급은 조선 후기에 북경을 왕래하던 사절단을 통해 유입된 서양화적과 견문, 그리고 서양의 선교사 출신 화가들이 그린 청나라 궁정양식과 서양경(西洋鏡) 또는 양편(洋片)풍으로 다루어진 연화(年畵)나 삽화류에 의해 전래되었으며, 이 시기 회화 창작의 형사적(形似的) 전신론(傳神論)과 밀착되어 실물감을 증진시키는 조선화의 기법으로 활용된 바 있다. 이와 같이 화법으로 수용된 1차 파급 때와 달리 2차 파급은 1890년 12월에 입국했던 영국인 화가 핸리 사베지 랜더를 비롯해 외국 서양화가의 내한 등에 자극을 받아 전공자가 탄생하고 서양화단이 형성되는 시스템 자체를 구축하게 했으며, 1920년대 후반경부터 ‘동양화’를 누르고 한국미술계를 이끌어 나가게 되는 원인을 직접 제공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1890년대는 문명개화하고 부국강병한 국민국가 구축과 결부되어 근대적 표상시스템과 새로운 미술체제가 탄생하기 시작했던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태동은 식민지 국민국가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1950년대까지 유사한 구조를 이루며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189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의 한국 근대미술사를 개화기와 식민지 초기·중기·후기·말기, 그리고 해방공간 및 제1공화국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 미술조류와 제도·양식·담론 등을, 대종을 이루었던 회화 중심으로 서술해 보고자 한다.

제2강 개화기의 미술

유학과 한문학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세적 보편성에 토대를 두고 동아시아 책봉체제의 핵심 왕조로서 성장을 도모했던 한국은 조선 후·말기를 통해 이러한 중세문화를 개혁하고 재흥하면서 그 절정기를 이룩했다. 그리고 상품화폐경제의 활성화에 힘입어 부분적으로 근대 이행의 기반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근대적인 ‘문명개화’로의 전환 문제가 전면에 대두되어 담론을 지배하면서 시대적 과업으로 떠오른 것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이란 세계사적 대세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대세에 따라 1876년 근대 일본에 의해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로 편입된 조선왕조는 1880년대까지 수구와 개화의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극심한 정치적 대립으로 표류하다가 1890년대에 이르러 농민전쟁과 청일전쟁으로 야기된 갑오개혁을 통해 ‘문명개화’를 시대적 대세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근대’를 시대적 추세로 체험하면서 태동시켰던 개화기(1890년대~1900년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개화기에는 기존의 왕조적 체제와 질서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열강들과 같은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특히 ‘문명개화’는 강요된 시대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추진되었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선택보다 불가피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신문명을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전반적인 변혁을 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세상을 온통 뒤바꾸는 충격적인 서양의 신문명이 강압적인 형태로 동점해 옴에 따라 이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제기되었던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논리를 통해 동서문명과 전근대 및 근대문명이 교착되던 이중적 모순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던 것이다.

동도서기론은 바뀔 수 없는 ‘도’와 수시로 변하는 ‘기’는 서로 분별된다는 ‘도기상분(道器相分)’의 성리학적 논리에 바탕을 두고 제창된 것이다. 이에 따라 동양의 정신사상 및 도덕적 규범과 질서인 ‘동도’는 고수·유지하되, 서양의 이용후생적 생산기술과 문물제도인 ‘서기’는 채용하는 동서문명의 분립적 결합을 통해 양자의 모순을 해결하면서 부국을 이루고자 했다. 동서문명 자체의 내재적 모순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근대적 전통을 수립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속에서 서로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양자를 단순 조합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개화기에는 기존의 ‘서화’와 새로운 개념의 ‘미술’이 ‘동도’와 ‘서기’의 차원에서 분열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1. 서화시대의 연속

고려 중기경부터 흥기되어 도덕적인 심성 양성의 영역에서 육성되어 온 ‘서화’는 ‘동도’의 영역에서 기존의 창작관습을 지속시키면서 새로운 시대 변화에 대처했다. 특히 이 시기의 서화계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창작과 수집, 감평 등의 활동에서 중추세력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던 비양반 출신인 중서층 중심의 여항문인서화가 인맥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취향과 성향을 계승하면서 전개되었다. 역관과 의원, 화원과 같은 중인층과 이서배를 포함하는 중서층으로 구성된 여항문인들은 양반사대부에 버금가는 학예 담당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지배층의 하부구조를 이루며 영달을 꿈꾸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 수립보다 상층 문인문화를 비롯한 주류적 경향을 추종하며 기량을 발휘함으로써 서화시대의 절정을 이룩하기도 했다.

여항문인들은 학예 방면에서 김정희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던 북학주의에 동조하여 청조(淸朝)문화와의 교류에 앞장섰고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바 있다. 이러한 풍조는 개항기의 ‘왜양일체(倭洋一體)’적 인식을 비롯해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등으로 야기된 반일 감정에 편승하여 주류를 이루며 지속되었다. 특히 개화전기의 정세를 주도했던 김윤식과 어윤중 등의 시무개화파와 중서 출신의 실무관료들이 ‘동도’의 보루인 청과 기존관계를 유지하기 바라면서, 청국의 변화를 모델로 삼아 추구했기 때문에 약화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1) 장승업 화풍의 성행

개화기의 서화계는 1880년대를 전후하여 두각을 나타내면서 당대 제일의 ‘신품(神品)’ 화가로 손꼽혔던 장승업(1843~1897)의 분방한 열정과 탁월한 기량을 통해 형성된 오원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장승업은 지금의 서울 당주동 부근인 야주개의 지전(紙廛)에서 민화류 제작에 종사하던 중, 북경역관으로 한성판윤에까지 오른 서화애호가 변원규(1837~?)가 그의 천재성을 발견함으로써 정통화 전문화가로 활약하게 된 인물이다. 화원화가 유숙(1829~1873)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도 전하는 그는 중인들의 세거지이며, 청나라 상인들이 크게 상권을 형성하고 있던 지금의 광교 부근에 ‘육교화방(六橋畵舫; 육교는 청계천의 여섯 번째 다리로 광통교의 별칭이었다)’이란 화실을 두고 제작했었다. 중촌을 무대로 활동했던 장승업은 서화수집으로도 유명한 북경역관 집안의 오경림과 오세창을 비롯한 애호가들의 후원을 받으며 최고의 명수로 이름을 날렸는데, 화명이 높아지자 왕실의 대령화원으로 선발되어 신선도류의 세화(歲畵)를 진상하기도 했다.

장승업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강호조어도〉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 말기에 문인화의 원류로서 숭배되었던 예황법(倪黃法)의 간일하고 성근 소림모정(疏林茅亭)류 산수화를 다루기도 했고, 호암미술관 소장의 〈방황자구산수도〉와 같은 김홍도·이인문 이래의 화원화가들에 의해 관학화된 남종화풍의 정형산수를 그린 바도 있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하며 인기를 누렸던 오원양식의 특징은 앞시기의 화풍을 한층 호방하게 구사하면서, 동아시아 왕조 말기 양식으로 대두되었던 기이하면서도 환상적인 경향을 새롭게 수용하여 이를 강렬하고 정밀하게 나타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오원양식에는 장승업의 별호인 ‘오원(吾園)’이 19세기 초에 상해의 옛 성인 오원에서 결성되었던 ‘오원서화집회(吾園書畵集會)’에서 연유되었을 가능성이 추측되듯이 그가 즐겨 방작의 대상으로 삼았던 양주파의 참신한 감각과 함께 청 말기 상해 지역의 해파(海派) 화풍과의 관련성이 눈에 띈다. 1842년 아편전쟁으로 개항된 상해는 신흥도시로 급성장하여 중국 제일의 서화 중심지가 되었으며, 1883년 인천과 기선이 왕복되면서 양국 교류의 핵심지로 부각되었던 곳이다. 특히 새로운 석판 인쇄술에 의해 질적·양적으로 개량되어 생산된 《해상(海上)명인화보》와《시중화(詩中畵)》를 비롯한 이 지역 출판의 각종 화보류가 유입되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1880년대에 광통교에서 관수교 사이의 중촌 일대에 상해와 가까운 산동성과 절강성 출신 청국 상인이 커다란 상권을 형성하면서 이를 통해 해파 화풍의 유입과 수요가 촉발되었을 가능성도 추측된다.

왼쪽 안중식 〈추경산수〉 종이에 수묵담채 142.5×40cm 1918

오른쪽 장승업 〈방황자구산수도〉 비단에 수묵담채 151.2×31cm 19세기 후반 오원양식은 심한 변형으로 기괴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산수화로 명성이 높았다. 이는 안중식·조석진에 의해 형식적으로 심화된다.

오원양식은 심한 변형으로 기괴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산수화와 도석 및 고사인물화와 당분법(撞粉法)에 의해 호분과 농묵을 덧칠하거나 수묵과 담채의 번지기 또는 몰골법으로 자유롭고 활달하게 나타낸 감각적인 화조동물화에서 특히 명성이 높았다. 오파(吳派)의 문징명에 의해 유행되었던 좁고 긴 협장화(狹長畵)에 사선구도로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중첩되게 구축하고, 공간감보다는 심한 동세의 형태감을 강조하여 장식적이고 과장된 작풍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리고 갈대와 기러기를 소재로 그린 노안도를 새롭게 유행시켰는가 하면, 한쪽 발을 들고 나무에 앉아 있는 매그림에서 강한 기상을 발휘했으며, 박고도(博古圖)와 청공도(淸供圖), 병화도(甁花圖)류를 결합하여 발묵풍 음영법과 청신한 담채의 효과가 돋보이는 기명절지화를 완성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이와 같이 속장(俗匠) 출신으로 대령화원에까지 올랐던 장승업은 기존의 수기자오(修己自娛)적인 문인주의 중심 조류를 답습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해파를 위시해 동아시아 왕조 말기의 국제양식을 수용하고 문인화와 원체화와 민간화를 융합하여, 신운이 감도는 탁월한 기량으로 개화기 서화계의 기반을 새롭게 다졌다. 특히 오원양식의 과장된 고전성과 함께 초현실적인 환상성과 장식성, 통속적인 길상성 등은 개화기의 격동 속에서 ‘기람(奇覽)’과 ‘기담(奇談)’, ‘기문(奇聞)’과 같이 신기하고, 기발하고, 보기 드문 것을 선호했고, 위기를 구원해 줄 초인의 출현을 갈망했던 격변의 시대상에 부응하는 환술적 조형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근대기의 국학자였던 안확(1886~1946)이 ‘신시대화의 매개자’로 평가하기도 했던 장승업의 이러한 오원양식은 동년배인 양기훈(1843~1919 이후)의 노안도를 비롯해, 장승업 타계 이후의 개화기 서화계를 주도했던 조석진(1853~1920)과 안중식(1861~1919) 등에게 계승되었다. 기술직 중인과 여항문인의 후손이었던 조석진과 안중식은 1881년 제도사(製圖士)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천진에 다녀온 후, 1900년을 전후하여 어용화사로 명성을 높이고 지방 군수 등을 거친 다음 1907년부터 창작활동에 전념하였다.

개화 후기 서화계 최고의 지도자이며 대가로 손꼽혔던 조석진과 안중식은 화첩이나 선면과 같은 소품 산수화에서 예황법의 간일 소산한 문인풍 소림모정류를 즐겨 그렸으며, 큰 족자나 병풍에서는 정밀한 필치와 구도로 관학화된 정형산수를 많이 그렸다. 후자의 경우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 출신의 여항문인화가로 장승업과도 교유했던 김영(金瑛, 1837~?)의 〈산수도〉 병풍에서 선행 사례로 볼 수 있는 높이 쌓아 올린 구성법과 함께 송곳니처럼 생긴 이빨형 돌기와 구름 모양의 산형을 좀더 세밀하게 형식화하여 1920년대 초엽까지 유행시켰다. 도석과 고사류의 인물화에서는 장승업이 활용했던 상해에서 출판된 화집식 화보류의 구도와 도상을 차용해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인물의 복식 등에 양람(洋藍)

과 양홍의 새로운 안료를 사용하여 장식효과를 높이면서 굵은 윤곽선과 정밀한 선염을 베풀어 고풍을 강하게 나타내고자 했다. 길상적인 호사취미와 결부되어 많이 그려진 화훼·화조화와 어해화, 기명절지화 등에서도 같은 경향을 보였는데, 안중식의 1908년경 작품인 〈구고청향도(九皐淸響圖)〉의 단정학에 보이는 호분을 덧칠한 기법은 장승업 〈쌍마도〉의 말에 구사된 당분법을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석진과 안중식의 화풍은 주로 장승업이 계승·도입·개발한 경향을 형식적으로 심화시킨 것으로, 강필주(姜弼周, ?~1930년 이후)를 비롯해 후학인 이도영(李道榮, 1884~ 1934) 등에게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지전과 화랑의 과도기적 유통형태였던 서화포와 서화관의 인기양식으로 성행했다. 1900년대에는 안중식과 조석진의 사화숙(私畵塾)을 통해 확산되기도 했으며, 이도영의 《모필화임본》과 같은 보통학교 도화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유포되었다. 그리고 1911년 전통 서화가의 육성을 위해 이왕직과 총독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설립된 서화미술회의 지도양식이 되어, 1920년대의 ‘동양화’로 재편되면서 일본의 개량양식을 본격적으로 차용하기 직전까지 서화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월간미술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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